[작은책 2025-08-05] 이웃을 돌보고 세상을 살리는, ‘아는 의사’_ 조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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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천의료사협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25-09-2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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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이 만난 사람

 

이웃을 돌보고 세상을 살리는, ‘아는 의사’_ 조규석

글_ 최규화  사진_ 정인열


https://www.sbook.co.kr/read?tpf=board/view&board_code=15&code=4326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 사진_ 정인열

 

살다 살다 이런 의사는 처음 봤다. 길바닥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의사라니. 그 이유가 더 기막힌다. 의사를 위해 뭔가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공공병원’을 만들라는 농성이다.

이 낯선 풍경의 주인공은 부천시민의원의 조규석(58) 원장. 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다. 그는 부천시공공병원설립시민추진위원회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2022년 발족한 시민추진위는 2024년 1월, 시민 8300명이 서명한 ‘부천시 공공의료원 설립 및 운영 조례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공공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시민의 손으로’ 발의된 것은 경기 성남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의회는 1년 넘게 거북이걸음만 걸었다. 2025년 4월 30일까지 조례안의 가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부결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그때 조 원장이 ‘천막농성’을 떠올렸다.

“이대로 놔두면 100퍼센트 부결인데, 잠을 못 이루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둬선 안 되겠더라고요. 의회에 맡겨만 놓고 아무 노력도 안 했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잖아요. 혹시 이번에 부결되더라도 다음에 주민들한테 ‘조례를 다시 제정할 수 있게 서명해 주세요.’라고 말하려면, 우리도 최선을 다하는 걸 보여 줘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천막을 칩시다!’ 했죠.”

상임대표다운(?) 결의를 보였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다 반대했어요. ‘그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웃음)’ 어설프게 끝날까 봐 걱정한 거죠.”

 

2025년 4월 기습적으로(?) 시작한 부천시 공공의료원 조례 가결 촉구 천막농성. 사진_ 정인열

 

2025년 4월 기습적으로(?) 시작한 부천시 공공의료원 조례 가결 촉구 천막농성. 사진 제공_ 조규석

 

이선주 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전무이사는 지난 4월 <민중의소리> 기고 글에 “(천막농성 당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라고 썼다. 그럴 만도 하다. 조 원장은 4월 14일, 기습적으로(!) 농성을 시작해 버렸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알린 채, 부천시청 앞에 천막을 쳤다. 1년 치 휴가를 몽땅 몰아 쓰고, 진료실을 떠나 천막을 지키기 시작했다.

“천막에 있으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실 피곤했어요.(웃음) 잠도 못 자고 계속 긴장하면서 지냈죠. 계속 뭔가 바쁘게 해야 돼서, 지루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요.”

 

걱정과 긴장 속에 시작한 농성이지만, 분명 효과가 있었다. 농성장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재빠르게 조직됐고, 농성을 지지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발길이 밤낮없이 이어졌다.

결국 4월 29일, 부천시의회는 주민들이 발의한 공공병원 설립 조례를 통과시켰다. 논의 과정에서 ‘민간위탁’ 조항을 집어넣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시민들이 막아 냈다.

시민들이 직접 싸우고, 함께 이뤄 낸 성과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시민추진위 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시민들이 다 (농성장을) 방문해 주고, 도와주고, 그리고 결국 이뤄 내는 과정을 모두 직접 경험한 거니까.”

 

“시민추진위 상임대표로서 당연한 역할”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천막농성은 누구보다 조 원장 자신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또 한 번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고 말할 정도다.

 

부천시 공공의료원 조례 가결 환영 기자회견에서 꽃을 받고 활짝 웃어 보이는 조규석 원장. 사진 제공_ 조규석

 

 

천막농성을 통해 저는 제 삶을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가. (…) 제 삶을 지탱하는 힘은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슴 벅찬 감동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 보여 주신 그 따뜻한 마음과 진심 어린 눈빛, 그 감동의 순간들이 모여 제게 힘을 주는 거대한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5월 30일 주민조례 가결 및 천막농성 보고대회 인사말 중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2022년 <민중의소리>에 실린 조 원장의 인터뷰 기사에서 충격적인(?) 대목을 찾아냈다. “대입 시험을 치르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의대에 진학”했다니. 아니, 남들은 아무리 생각하고 열망해도 못 가는 의대를, 어떻게 하면 “생각지도 못하게” 갈 수 있을까.

“공부 많이 하는 과는 안 가고 싶었어요. 의대는 절대 안 간다 했는데, 공대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재수해서 점수에 맞추다 보니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의대에) 간 거예요.(웃음)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조규석 원장은 고등학생 때 서울로 이사했다. 사진 제공_ 조규석

 

그가 태어난 곳은 전북 전주. 고등학교 2학년 때, 형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했다. 1987년 충남 아산에 있는 순천향대학교에 들어갔다.

신입생 100명 중 다섯 명한테만 주는 장학금도 받았다. “장학금 받는 애들 중에 과 대표를 하라”던 교수님 덕분에, 위에서 두 명 빼고 밑에서 두 명 빼고 ‘다섯 명 중 딱 중간’이었던 그가 과 대표가 됐다. ‘87학번 과 대표’. 운명적인 시기에 운명적인 이름으로 살게 됐다.

“어설프게 과 대표가 됐는데, 87항쟁 분위기가 전국에 퍼지면서 우리 학교에서도 학내 민주화 투쟁이 막 일어났어요. 1학년 대표로 토론회도 이끌고, 수업 거부 투쟁에도 참여했죠.”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간 의대. 87학번 과 대표라는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제공_ 조규석

 

어쩌다 보니(?) 조 원장은 ‘강경파’가 돼 있었다. 그는 “처음에 앞에 나서던 사람들이 점점 투쟁에서 빠져나가면서 ‘순진한 사람들’만 남게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한번은 학과장이 학생들 앞에서 저를 손찌검하려 해 가지고 난리가 났어요. 의대는 ‘다운’(유급)이란 게 있어요. 교수님이 저한테 ‘니가 본과를 올라가면 내가 장을 지진다!’ 그랬어요. 그때 동기들이 ‘과 대표가 이렇게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해서 많이 도와줬죠.”

조 원장은 동아리 ‘참의료연구회’를 만드는 등, 진보 활동을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개원 시절. 뒷줄 맨 오른쪽이 조규석 원장. 사진 제공_ 조규석.

 

그가 순천향대 부천병원 외과 교수가 된 건 2001년. 전공의를 마치는 해에 마침 부천병원이 개원했고, ‘개원 멤버’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북한 어린이 의약품 지원 운동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쌍용차 파업농성 의료 지원과 기아차 비정규직 고공농성 등 노동자들의 투쟁에 현장 진료로 연대했다. 이주노동자와 노숙인들을 위한 의료봉사도 꾸준히 이어 갔다.

 

2008년 만경대어린이종합병원 후원자 평양 방문 당시.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조규석 원장. 사진 제공_ 조규석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현장진료로 연대했다. 가운데가 조규석 원장. 사진 제공_ 조규석

 

2015년 12월 22일 서울 옛 국가인권위원회 전광판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진료를 위해 올라간 조규석 원장과 길벗한의사회. 사진 제공_ 조규석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단식 농성. 사진 제공_ 조규석

 

조 원장은 통합진보당의 마지막 보건의료위원장이다. 그가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건 노무현 정부 때다. 원래 ‘노사모’에서 활동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가 무산되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것을 보고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이후 통합진보당까지 쭉 이어서 활동했다.

그는 아직도 ‘통합진보당 보건의료위원회’ 깃발을 간직하고 있다. 깃발 이야기가 나오자 조 원장이 “아, 여기 있어요.” 하며 진료실 한쪽 서랍을 연다. 그리고 깃발을 꺼내 펼쳐 보였다. 진료실을 이사(?)할 때도 갖고 다녔다. 박근혜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한 게 2014년인데, 10년이 넘도록 이 깃발을 갖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인터뷰 중 진료실 서랍에서 '통합진보당 보건의료위원회' 깃발을 꺼내 보였다. 사진_ 정인열

 

“언젠가 집회 끝나고, 이걸 들고 갈 사람이 없어서 우연히 제가 들고 온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돼 버린 거죠. 더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당 해산으로) 더 하지 못한 게 아쉬운 상황이었어요. 진보정당의 보건의료 부문 활동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인 거죠.”

 

2013년경부터 그는 시민들과 함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준비했다. “시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협동조합이었다.

“정책 토론회를 많이 가 봐도 뭔가 허전해요. 듣기엔 다 좋은 말이긴 한데,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느낌? 좋은 정책이 있어도 실천할 동력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동력은 정치인들한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운동하는 사람들한테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죠. 주민들이 필요를 느끼고 함께 모여야, 그게 힘이 되고 그 힘이 정치를 바꾸는 거니까요.”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설립 동의자 500명과 출자금 1억 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조 원장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지역에는 수상한 소문(?)도 돌았다.

(설립 동의자) 500명을 만들려고 지역에 있는 산악회, 향우회, 자율방범대를 다 돌았어요.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막 모아서 결국 500명을 만들었죠. 그러다 보니 ‘조규석이 선거 나오려고 협동조합 만드는 거’라고 헛소문이 퍼진 적도 있어요.(웃음)

2015년 협동조합 창립총회를 하고, 2017년에는 부천시민의원을 개원했다. 양귀자 소설 <원미동 사람들> 덕분에 유명해진 부천시 원미동. 좁다란 시장 골목 안에 자리한 마을 병원이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가치를 지키며 병원 살림까지 꾸려 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적자가 계속됐고, 사태를 진화할 ‘소방수’가 필요했다. 순천향대 부천병원에서 일한 지 딱 20년 되던 해인 2021년. 조 원장은 대학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부천시민의원 진료실로 자리를 옮겼다.

‘잘나가는’ 대학병원 교수가 동네 협동조합 병원의 의사가 된 것. 조 원장은 학계에서도 손꼽히는 위암 수술의 권위자였다. 2006년엔 국내 최초로 ‘위암 복강경 위 절제 수술’ 라이브 시연에 성공해, 순천향대 부천병원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의대 교수라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논문도 많이 쓰고, 발표도 남들 하나 할 때 저는 꼭 세 개씩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인정을 해 줬나 봐요.”

 

순천향대 부천병원 외과 교수 시절. 사진 제공_ 조규석

 

그런 사람이 갑자기 사표를 쓰고 시장 골목의 작은 동네 의원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대학병원 사람들이 순순히 보내 줬을까. 

(대학병원 사람들이) 말리려고 하다가, 제가 협동조합 활동 때문에 나간다고 하니까 ‘헉!’ 하는 거죠. ‘대학병원 교수가? 설마?’ 아예 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걸 하러 나간다고 하니까 더 이상 아무도 말을 못하더라고요.(웃음)

 

 

그의 결단에는 2018년에 받은 상이 큰 영향을 줬다. ‘강희대부천시민상’. 평생 민주화에 헌신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노력하다 2002년 세상을 떠난 강희대 선생을 기리는 상이다.

조 원장은 그때를 인생의 ‘변곡점’ 중 하나로 꼽는다. 훌륭한 뜻을 가진 상을 받으면서 가족들의 인정과 지지도 함께 얻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부천시민의원을 직접 책임지겠다는 결심이, 가벼운 고민의 결과로 나오진 않았을 거다. 당시를 떠올리며 조 원장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운동은 스스로 해야지, 남한테 맡겨도 안 되고 기대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부천시민의원은 소설 (원미동 사람들)로 유명해진 부천시 원미동 시장 골목 안에 있다. 사진_ 정인열

 

부천시민의원 실내. 사진_ 정인열

 

우리 지역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 협동조합 운동의 철학과도 같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부천시민의원을 지키며 ‘건강공동체’를 위한 길을 꾸준히 걸어온 덕분에, 그 힘이 현재의 성과로 이어졌음이 분명하다.

“공공병원 주민조례 제정 운동을 할 때도, 우리 조합원 한 사람이 100명씩, 200명씩 서명을 받아 오는 거예요. ‘부천시민의원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모여서 또 공공병원을 만들려고 한다, 그럼 좋은 거지! 우리가 도와주자!’ 이렇게 되는 거죠. 지금 공공병원 조례 제정이란 결과도 협동조합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봐요.”

 

2023년 10월 13일 열린 부천시 공공병원 설립 기원 시민 걷기 행동. 사진_ 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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